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를 위한 교육의 역할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더 나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1. 더 나은 사회란 무엇인가
더 나은 사회란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 21세기를 맞고 있는 현대 사회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적자 생존’이라는 법칙 아래, 모든 영역에서 전 세계적 경쟁을 통해 승자는 모든 것을 갖게 되며 뒤쳐지는 사람은 퇴출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현 사회가 더 나은 사회,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날로 늘어나고 있는 자살률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자살과 사회의 문제와는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정되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더 나은 사회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만일 개인의 입장에서 이것을 정의한다면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는 사회, 또 다른 사람은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회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라는 큰 맥락에서 봤을 때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이며 이기주의는 사회를 좀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라고 이야기하는 사회 중 가장 극단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서로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세상엔 경쟁을 즐거워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모르핀을 맞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타당한 수준의 더 나은 사회를 말한다면, 가장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사회가 후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행복 하나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더 나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피해를 볼 수 있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더 나은 사회로는 나쁜 것을 고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회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나쁘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나쁘다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나쁘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를 위한 교육의 역할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 나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많은 내용을 할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먼저 더 나은 사회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 사회로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문제점도 알지 못하면서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패망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교육 개혁 시도가 항상 실패로 끝난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
2.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교육
지금까지 교육은 사회의 존속을 위한,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루어져 왔다.[2] 따라서 교육학에서 사회변동을 다룰 때에도, ‘급변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 ‘국제화, 세계화에 부합하는 학교교육’ 등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기능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교육이 사회의 변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교육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의 범위를 확대하여 사회의 구성원이 사회의 변동을 주도하게 하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즉, 교육은 이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재편된 세계 질서에 저항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기대, 욕망, 태도, 경향 등이 우리의 후손을 위한 문화적 특징 요소, 즉 문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 중인 21세기 사회는 생명공학의 시대이다. 생명공학을 통해 우리는 아마도 지금까지 겪었던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더욱 빠른 시일에 겪게 될 것인데, 이 기술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3]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 있는 방관자의 역할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를 만들 것인가?
교육은 분명 사회변동을 일으킬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 지금까지 교육을 통한 사회 변동이 드물었던 이유는 전통적인 인식 체제 때문이지, 교육의 능력이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기에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었던 레닌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해머타운[4] 사나이들의 저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을 주체적 인간으로 각성시켜야 한다. 어떤 것도 비판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 교육을 누가 어디에서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학교교육이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교교육은 지배-복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역사적으로 학교교육은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학교라는 공간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사회 개혁을 위한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 세계화 시대에서 초국가적 기업의 영향력을 개인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체의 힘이 필요한데, 학교는 그럴만한 충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앞으로의 학교는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을 실현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이 해소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할 수 있다면,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 된다.
3. 교육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교육은 학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즉 학교가 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의 학교 교육은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져 왔다. 교육 개혁을 통하여 학교 교육을 시민 사회에 맞는 교육으로 재정립할 수만 있다면, 분명 학교 교육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주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기득권 세력 또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강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비민주적이고 상명하달 방식의 학교 교육에서는 사회변혁을 추구할 가능성조차 없다.
또한 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의 수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학생은 교사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이 학교 교육을 담당한다면 분명 학교 교육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교육을 통하여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시도에는 많은 문제가 놓여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들이 어렵고 극복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교육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